니자이나리 찾지 않는 이름들 전효원 신작 리뷰
2026년 2월의 부산, 창밖으로 보이는 광안대교의 불빛은 여전히 화려하지만, 피부에 닿는 바닷바람은 유독 시리게 느껴지는 밤입니다.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열에 아홉은 AR 글래스를 끼고 허공을 응시하며 걷더군요. 바로 옆 사람이 넘어져도 '내 알고리즘'에 뜨지 않는 정보라면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는 세상. 우리는 역사상 가장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자부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고립된 섬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문화 살롱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책은, 바로 이 차가운 디지털 빙하기를 맨몸으로 뚫고 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전효원 작가의 신작 <찾지 않는 이름들>. 베스트셀러 매대 구석, 화려한 홀로그램 표지들 사이에서 투박한 종이 질감으로 숨죽이고 있던 이 책을 집어 든 건 제 인생의 행운이었습니다. 3년의 침묵 끝에 작가가 들고 온 것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애써 '삭제' 버튼을 눌러버린 부채감에 대한 청구서였으니까요. 오늘 밤은 조금 쓴 커피를 준비하셔도 좋겠습니다. 우리가 마주할 진실이 제법 쓰고, 또 아리기 때문입니다.

1. 침묵으로 쓴 애도의 기록
전효원 작가는 데뷔 초부터 '가장 낮은 곳의 목소리를 가장 투명한 딕션으로 받아 적는 서기'라는 평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찾지 않는 이름들>의 문장은 투명함을 넘어 서늘할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출판계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작가가 지난 3년간 펜을 놓은 채 실제 특수청소 업체(유품 정리 업체)의 현장 보조로 일하며 바닥부터 굴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일까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활자가 아니라 현장의 냄새가 훅 끼쳐 오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주인공 '수호'는 감정이라는 기능을 스스로 거세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매일 아침 방호복 지퍼를 올립니다. 그가 마주하는 2026년의 고독사는 참혹합니다. 단순히 시신이 부패한 현장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최신형 AI 케어 로봇이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주인 곁을 지키며 "식사하실 시간입니다"를 반복했다는 대목에서는 등골이 오싹해지더군요. 기술은 발전했지만, 그 기술이 죽음의 쓸쓸함까지는 케어해주지 못한다는 잔인한 증거니까요.
작가는 수호의 시선을 빌려, 시신이 수습된 후 남겨진 '사물의 언어'를 해독합니다. 편의점 1+1 행사로 사 와서 곰팡이가 피어버린 식빵 반쪽, 냉장고 문에 붙은 3년 전 가족사진,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수면제 통. 작가는 이 사소한 물건들을 통해 고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싶어 했는지', 혹은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를 웅변합니다. "죽음은 악취로 기억되지만, 삶은 결국 쓰레기로 증명된다"는 수호의 독백은 물질적 풍요 속에 살면서도 정서적 기아에 허덕이는 우리 명치를 세게 때립니다. 저는 이 챕터를 읽다가 잠시 책을 덮고, 제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만약 오늘 내가 사라진다면, 내 방의 물건들은 나를 어떻게 증명할까. 그 생각이 꼬리를 물자 쉽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2. 낡은 수첩이 잇는 인연
소설의 공기가 바뀌는 것은 수호가 서울 관악구의 한 반지하 방, 고독사한 50대 남성 '김 씨'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낡은 가죽 수첩 하나를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2026년에 종이 수첩이라니요. 모든 것이 클라우드에 저장되는 시대에, 스마트폰 잠금 패턴 하나면 한 사람의 인생이 완벽하게 봉인되는 이 시대에, 그 수첩은 너무나 이질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수첩 가죽은 손때가 타서 반질반질했고, 속지에는 침을 묻혀 넘긴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그 안에는 삐뚤빼뚤한 볼펜 글씨로 적힌 세 사람의 이름과 알 수 없는 약도, 그리고 "미안하다, 그때 밥이라도 먹였어야 했는데"라는 투박한 메모가 적혀 있었죠. 수호는 규정대로라면 폐기물 봉투에 넣었어야 할 이 수첩을, 충동적으로 작업복 주머니에 찔러 넣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한 유일한 '인간의 온도'였기 때문일 겁니다.
이때부터 소설은 수호가 수첩 속 이름들을 찾아 나서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띱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수호가 첫 번째 이름의 주인공인 20대 청년을 찾아갔을 때, 청년은 에어팟을 낀 채 "아저씨, 저 잡상인 사절이거든요?"라며 문을 쾅 닫아버립니다. 수호가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김 씨 아저씨가 남긴 말이 있어서요..."라고 작게 읊조렸을 때야 비로소 문이 다시 열리죠.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소통이 단절된 사회의 벽이 얼마나 높고 견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놀라운 반전은 수첩 속 인물들이 고인의 가족이나 친척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매일 아침 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던 공시생, 폐지 줍다 넘어진 김 씨를 일으켜 세워준 할머니, 그리고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 혈연도 지연도 아니지만, 삭막한 도시에서 찰나의 순간 '눈을 마주쳐준' 사람들. 김 씨는 그 짧은 온기를 잊지 않고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배경화면으로만 존재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실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진실이 밝혀질 때, 독자는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연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흘려보내고 있을까요?
3. 고의적 망각이라는 폭력
이 소설이 단순한 감동 스토리를 넘어 문제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제목 <찾지 않는 이름들>에 담긴 중의적 의미를 파헤치는 대목 때문입니다. '찾지 못하는' 실종이 아니라, '찾지 않는' 유기. 여기에는 명백한 고의성이 담겨 있습니다. 전효원 작가는 현대인의 '선택적 망각'을 아주 예리하게,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집요하게 꼬집습니다.
소설 중반, 수호가 고인의 유일한 혈육인 딸에게 연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딸의 반응은 충격적입니다.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그녀는 차분하게 묻습니다. "유품 처리 비용은 보증금에서 해결되나요? 저는 갈 상황이 못 되니, 남은 건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그녀를 악녀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저 2026년의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피로에 찌든 소시민으로 묘사합니다. "아버지의 죽음보다 다음 달 대출 이자가 더 무섭다"는 그녀의 대사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공포스럽습니다.
특히 소설은 유족들이 장례식장에 직접 오는 대신, '메타버스 추모관' 링크를 지인들에게 뿌리고 AI 상주가 조문객을 맞이하게 하는 풍경을 묘사합니다. "죽음마저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는" 2026년의 세태. 전효원 작가는 기술이 인간의 육체적 수고는 덜어줄지 몰라도, 죄책감이나 슬픔의 무게까지 대신 짊어질 수는 없음을 경고합니다. '찾지 않음'으로써 얻은 일시적인 평온은 결국 영혼을 갉아먹는 독이 된다는 것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딸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죠. 이 챕터를 읽으며 저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 주소록을 열어보았습니다. '차단' 목록에 들어있는 이름들, 그리고 귀찮아서 연락을 미뤄둔 이름들. 어쩌면 저 역시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죽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4. 무채색 풍경 속의 온기
무거운 주제, 숨 막히는 현실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은 전적으로 전효원 작가의 독보적인 '미학적 문체'에 있습니다. 그의 문장은 흔히 '단단한 얼음 속에 갇힌 불꽃'에 비유되곤 합니다. 겉으로는 건조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문장 사이사이로 펄펄 끓는 연민이 배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소설 후반부, 모든 유품 정리가 끝나고 텅 빈 반지하 방에 오후 4시의 햇살이 창살 틈으로 길게 들이치는 장면의 묘사는 압권입니다. 작가는 시각적인 묘사를 넘어 독자의 오감을 자극합니다. 낡은 장판 틈새에서 나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독한 소독약 냄새가 섞인 공기, 그리고 그 너머에서 아주 희미하게 맡아지는 고인이 즐겨 쓰던 오이 비누 냄새. 창문을 열었을 때 들려오는 아이들의 하교길 웃음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
작가는 죽음이 휩쓸고 간 정적의 공간에 다시금 삶의 소음들이 밀려들어오는 순간을 숨 막히게 아름답게 포착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잔인한 진리이자, 동시에 "떠난 자의 자리는 산 자들의 기억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의무를 상징합니다. 먼지 한 톨, 빛 한 줄기조차 허투루 쓰지 않는 작가의 치밀한 연출 덕분에, 독자는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고독사 현장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성스러운 인간애를 발견하게 됩니다. 차가운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건져 올린 이 작은 온기야말로, 전효원 작가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요?
5. 기억에 빚을 지고 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났을 때, 제 커피는 이미 차게 식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더군요. 창밖을 보니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저 '도시의 야경'으로만 보였을 저 불빛들이, 이제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수많은 창문 뒤 어딘가에는, 오늘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며 홀로 TV 소리에 의지해 밤을 견디고 있을 테니까요.
소설 <찾지 않는 이름들>은 우리에게 묵직하고도 시급한 숙제를 남깁니다. 그것은 거창한 사회 운동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들어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혹은 혼자 계신 부모님에게, 아니면 매일 마주치는 경비원님에게 "식사하셨어요?"라는 따뜻한 안부 한마디를 건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해 주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소멸 앞에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 속에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나를 기억해 준 누군가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듯, 우리도 누군가를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2026년 한국 문학이 거둔 가장 빛나는 성취이자, 올겨울 당신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단 하나의 온기. 슬프지만 비참하지 않고, 고요하지만 그 어떤 웅변보다 큰 울림을 주는 전효원의 <찾지 않는 이름들>을, 당신의 이름으로 추천합니다.
나의 평점: ★★★★☆ (4.8 / 5.0)
"이름을 불러주는 사소한 행위가, 때론 붕괴 직전의 한 우주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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