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황석영 장편소설 솔직 후기 및 서평

안녕하세요. 좋은 책과 문장을 나누는 블로거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요즘 서점에 가면 숨이 턱 막힐 때가 있습니다. '10억 버는 법',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26년 트렌드 전망'... 온통 "지금 뒤처지면 죽는다"고 협박하는 책들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 역시 그런 흐름에 휩쓸려 1분 1초를 쪼개 살다가, 지난 주말 문득 소파에 널브러져 천장을 보는데 왈칵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도대체 뭘 위해 이렇게 미친 듯이 달리는 거지?"
오늘 소개할 황석영 작가의 신작 <할매>는 바로 그런 순간, 우리 삶에 급제동을 거는 작품입니다. 팔순을 훌쩍 넘긴 거장이 내놓은 이 소설은 놀랍게도 사람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군산 하제마을, 지금은 미군 기지 철조망 옆에 홀로 남은 600살 팽나무가 주인공이죠.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사람의 말은 너무 시끄럽고, 짐승의 울음은 너무 처절하니, 차라리 나무의 침묵을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만약 지금 사람에게 치이고, 세상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고 계신다면, 이 늙은 나무의 이야기가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1. 600년의 침묵이 건네는 위로
우리는 늘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마음을 아주 차분하게 내려놓게 만듭니다.
소설 속 '할매(팽나무)'에게 인간의 생이란 고작 매미의 여름 한 철보다 조금 더 긴, 찰나의 소동일 뿐입니다. 600년을 한자리에 서서 보아온 나무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가 아등바등 싸우는 권력 다툼이나 부동산 문제 같은 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더군요.
책을 읽는 내내 묘한 해방감이 들었습니다. "아, 나는 그저 거대한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구나. 그래서 다 괜찮구나." 역설적이게도 나의 작음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을 짓누르던 거대한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조심스럽게 권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2. 팽나무가 기억하는 야만의 역사
황석영 작가는 전작 <철도원 삼대>에서 노동자의 핏줄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핏줄을 넘어 '수액'이 흐르는 생태의 역사를 썼습니다.

| 도서명 | 할매 |
| 저자 | 황석영 |
| 출판사 | 창비 (2025.12.12 출간) |
| 배경 | 전북 군산 하제마을 (미공군 기지 옆) |
| 주인공 | 600살 팽나무 (할매 나무) |
| 키워드 | 생태, 순환, 늙음의 미학, 기다림 |
[줄거리: 사라진 마을, 홀로 남은 나무]
이야기는 조선 초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던 혼란기,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금강 하구 언덕에 팽나무 씨앗 하나를 툭 떨어뜨립니다. 전란에 가족을 잃고 떠돌던 어린 승려 '몽각'이 이 싹을 발견하고 돌보면서, 나무와 인간의 600년 인연이 시작되죠.
하지만 이 소설은 낭만적인 전래동화가 아닙니다. 팽나무는 그 자리에서 임진왜란의 화마를 보고, 동학농민군이 죽창을 들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현장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갯벌이 메워지고, 미군 기지가 확장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는 '소멸의 과정'을 온몸으로 견뎌냅니다.
마을은 사라지고 사방에는 철조망이 쳐졌지만,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전투기의 굉음 속에 섞인 옛사람들의 웃음소리를 기억해 냅니다. 작가는 이 나무의 시선을 빌려 "인간이 땅을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가"를 서늘하게 꼬집습니다.
3. 인간 없는 곳의 진짜 이야기
이 책을 단순히 '환경 소설'이라고 부르는 건 작가에 대한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느낀 이 작품의 진가는 다음 세 가지 포인트에 있습니다.
3.1. "나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시점의 전복)
제가 가장 전율을 느꼈던 지점은 '시점(Viewpoint)'입니다. 보통 환경 소설은 파괴자인 인간을 비난하거나, 피해자인 자연의 억울함을 호소하느라 바쁘죠. 하지만 600년을 산 '할매'의 시선은 차원이 다릅니다.
나무에게 인간은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 같은 존재입니다. 팽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꺾어가는 아이들을 탓하지 않고, 뿌리 근처에 오줌을 누는 취객조차 거름으로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통을 베어내려는 전기톱의 소음 앞에서도 공포보다는 '연민'을 느낍니다.
"너희는 무엇이 그리 급해서, 스스로 숨 쉴 구멍조차 막아버리는가."
책 속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나무의 독백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이 초월적인 시선 덕분에 독자는 인간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아니 '우주적'으로 조망하게 됩니다.
3.2. 황석영의 문체, 늙음의 미학
과거 황석영의 소설들, 기억나시나요? <장길산>이나 <손님> 같은 작품들은 문장이 펄떡거리는 활어 같았죠. 힘이 넘치고, 때론 피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 책 <할매>의 문장은 다릅니다.
마치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거칠지만, 그 안을 흐르는 수액처럼 뭉근하고 깊습니다. 작가가 8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봅니다. 화려한 수사나 기교를 다 걷어내고, 툭툭 던지는 문장 속에 삶과 죽음의 순환을 담아냈습니다.
특히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잎을 떨구는 장면 묘사는 압권입니다. "버려야 산다"는 단순한 진리를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한 글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잠시 책을 덮고 눈을 감아보세요. 문장이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질 겁니다.
3.3. 호불호 포인트: 서사보다는 '정서'
물론, 이 책이 모든 분께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솔직한 가이드가 필요하겠죠.
이런 분껜 비추천: 기승전결이 뚜렷한 드라마틱한 사건, 악인에 대한 통쾌한 복수, 빠른 전개를 기대하신다면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책의 절반 이상이 나무가 바람과 대화하고, 뿌리로 땅의 진동을 느끼는 묘사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이 책은 가치가 있습니다. 넷플릭스와 숏폼 콘텐츠에 절여진 우리의 뇌를 '디톡스' 해주는 느낌이거든요. 사건이 아니라 '정서'를 읽는 책입니다.
4. 책장을 덮고 난 뒤의 여운
4.1. 내 곁의 '할매'를 찾아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나무 한 그루를 안아주고 싶어집니다. 저도 모르게 아파트 화단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를 한참 바라봤습니다. "너는 여기서 무엇을 보고 들었니?"라고 묻고 싶더군요.
이 책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죽고 사라진 뒤, 이 땅에 남을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쓰레기를 남기겠지만, 저 나무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조금 더 겸손하게, 조금 더 느리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4.2.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마음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닙니다. 군산 하제마을의 팽나무는 실존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지만 여전히 미군 기지의 소음 속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으신 후, 유튜브에서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를 검색해 보세요. 철조망 너머 홀로 서 있는 그 나무의 압도적인 자태를 보는 순간, 소설의 감동이 배가 되어 가슴을 칠 것입니다.
[이런 분들께 권합니다]
-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감명 깊게 읽은 분
- 김훈 작가의 건조하지만 뜨거운 문체를 사랑하는 분
- 무엇보다 잠시 삶의 속도를 줄이고 숨을 고르고 싶은 분
[이런 분들은 피하세요]
- 당장의 도파민이 터지는 자극적인 스릴러를 찾는 분
"오래된 미래가 나무 속에 있습니다.
올겨울, 당신의 마음속에 팽나무 한 그루 심어보시길 권합니다."
(※ 팁: 이 책은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으로 읽으시길 권합니다.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읽어야 '나무'의 이야기가 손끝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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